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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 2023. 12. 11. 18:53

서울의 봄 영화가 500만을 넘어 천만을 향해 가고 있는데요 저도 며칠 전 서울의 봄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내일이 바로 1212사태가 일어난 12월 12일이네요

 

그래서 오늘은 서울의 봄 영화의 실제 사건인 1212사태 군사반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영화를 보는내내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는데요 그래도 한국인이라면 1212사태나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알아야겠죠?

 

그럼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의 계기와 결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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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실존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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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사태 군사반란

 

 

 

우리가 1212사태 군사반란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는데요 하나회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고 1212사태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실존인물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실존인물

 

하나회 그들은 누구인가

1963년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 대한민국의 육군 사관학교 11기생들이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사조직으로 전두환의 쿠데타와 군부 정권을 지탱하였던 비밀 조직입니다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실존인물
하나회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실존인물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상초유의 사건이 일어났고 직후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으며 권력지형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되기는 했으나 계엄하에 사실상 권력의 축은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였고, 또한 10.26사건에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전두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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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1979년 11월 장태완(수경사령관)은 정승화(육군참모총장)로부터 수경사령관으로 일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면 고사했으나 장태완(수경사령관)은 결국 수경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장태완(수경사령관)으로 취임해 부대를 파악해 나갈 무렵 전두환은 각부처의 차관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고 보고되는 정보를 먼저 검토한 뒤 계엄사로 올려 보내는 행동들을 했습니다

 

이때 정승화(육군참모총장)는 전두환의 일권이 지나치다 싶어 발령을 내려했으나 당시 국방부장관 노재현이 조금 더 두고 보자는 입장을 보여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내용이 전두환에게 전해졌고 이후 전두환은 보안사 2인방과 함께 1026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있었다는 정승화(육군참모총장)를 내란방조죄와 감재규에게 돈을 많이 받았다는 혐의들을 엮어 연행할 1212의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전두환은 계획에 함께할 하나회세력들과 접촉했고 이와 함께 정승화(육군참모총장) 세력인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등을 사전에 묶어놓는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그리하여 12월 5일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화평은 장태완을 찾아 김장값에 보태라는 메모와 함께 백만 원권의 수표를 전하며 조만간 자리를 만들겠다는 전두환의 뜻을 전했습니다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마침내 운명의 날인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측 하나회 세력들은 경복궁 제30 경비단에 모였고 장태완은 전두환이 마련한 연희동 요정에 정병주 김진기 등과 모였으며 전두환은 정승화를 연행하는데 있어 정당화를 확보하기 위해 최규하의 재가를 받으러 총리공관으로 향했습니다

 

같은 시각 허삼수는 병력을 이끌고 참모총장공관으로 향해 경비병들을 무력화시킨 뒤 정승화를 연행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소리는 당시 국방부장관 노재현의 공관에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대한민국 국방을 책임지던 노재현은 이 소리에 놀라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공관을 빠져나가 차량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이를 알게 된 육참차장 윤성민은 전군에 진돗개 하나인 비상경계령을 내렸고 한편 연희동에서 자리를 하고 있던 장태완은 소식을 접한 뒤 급히 수경사로 향했습니다

 

➢ 12월 12일 19시 55분 : 총장 구출 특공대 1차 파견

 

장태완은 수경사로 가는 길에 부대를 편성해 출동을 지시했고 전단장들도 상황실로 모이라는 지시도 함께 내리며 밤 8시경 상황실에 도착했습니다

 

➢ 12월 12일 20시 00분 : 장세동 김진영 황동환 조흥 장사령관의 집합 명령 무시

➢ 12월 12일 20시 07분 : 총장 구출 특공대 2차 파견

 

하지만 그가 부대에 도착할 때까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자 그는 2차 부대를 출동시켰고 직접 상황파악을 위해 총리공관을 오갔으며 총장공관에서 총격을 가하는 부대를 밀어버리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12월 12일 밤 9시경 다시 수경사로 돌아온 장태완은 놀라운 사실을 보고 받게 됩니다

 

 

수경사 중에서도 성역부대라 할 수 있는 경복궁 제30경비단에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해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그리고 정병주의 지휘를 받아야 될 1공수 박희도 3공수 최세창 5공수 장기오와 자신의 부하인 장세동 김진영 등의 하나회 세력들이 모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건을 주도하는 이는 다름 아닌 당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각 최규하의 재가를 받지 못한 전두환은 그곳에서 하나회 세력들과 추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내막을 파악한 장태완은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승화를 즉각 복귀시키라고 요구했습니다

 

➢ 12월 12일 21시 : 30경비단에 모인 전두환 세력 "장태완 장군도 합류하시고' 회유

 

이때 유학성 황영사 등은 전화를 돌려받으며 장태완을 회유해 보았으나 분노한 장태완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 이 반란군 놈의 XX야! 니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의 머리 X을 다 날려버리겠어"

 

이후 장태완은 노재현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노재현의 행방은 여전히 모연 했고 상황을 해결해 보기 위해 상부에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배속을 요청했고 3군 사령관등은 그렇게 하겠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한편 밤 9시 30분경 장태완의 강경한 태도에 전두환은 박희도에게 부대를 출동시켜 육본과 국방부를 장악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박희도는 즉시 부대로 전화를 걸어 부대를 출동케 했으며 이 외에도 3공수 최세창, 5공수 장기오에게도 부대로 돌아가 대기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후 전두환은 하나회 세력들과 함께 최규하의 재가를 받으러 총리공관으로 향했으나 최규하는 국방부장관을 데리고 오라며 끝내 재가해 주지 않았고 같은 시각 박희도의 지시를 받은 1공수는 서울로 출동했습니다

 

 

➢ 12월 12일 22시 : 한강 19개 교량에 바리케이드 설치 지시

 

장태완은 1공수가 서울로 진입하지 못하게 한강다리를 막았고 이와 함께 30사단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1공수가 건널 것으로 예상되는 행주대교를 꼭 막아달라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군대 내 통신을 장악하고 있던 보안사 세력은 장태완과 통화한 30사단장에게 연락을 취해 알아서 판단하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공작으로 1공수는 진입했으나 얼마 후 중징계를 내리겠다는 육본 측의 경고로 인해 부대로 복귀하였습니다

 

육본 측은 이때 정병주에게 9공수 출동을 요청했으나 수송대에서 차량이 지원되지 않아 출동이 늦어졌습니다 10시 30분경 최규하의 재가를 받지 못한 전두환은 박희도에게 직접병력을 끌고 와서 국방부와 육본을 장악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 길고 박희도는 부대로 향했습니다

 

그때까지 장태완은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병력출동을 위해 재차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전과 달리 그들은 장관의 승인이 없어 안된다는 이유로 부대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았습니다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태완은 수경사에 남은 60명을 대상으로 전두환측에 대한 공격을 준비시키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하달했습니다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이때 이내용을 알게 된 노태우는 전방 9사단을 병력 중앙청으로 출동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자정이 되어가던 그때 서울까지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9공수가 출동하며 전두환측은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끼리 이러면 서울에서 내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부대들을 동시에 복귀시키자는 이른바 '신사협정'을 육본 측에 제안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거짓 제안을 받은 육본 측은 9공수에게 회군을 명령했고 그렇게 자정이 지나는 동안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최세창은 정병주를 제압했으며 박희도는 육본과 국방부를 장악한 뒤 노재현을 찾아 보안사로 이동시켰습니다

 

또한 같은 시각 황영시는 35대의 전차를 중앙청으로 출동하도록 했고 30사단장 박희모에게도 전화를 걸어 병력출동을 지시하였습니다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12월 13일 01시 30분 : 1공수단, 국방부 육본 점령수경사 전차대대 "장태완사살하라"

 

이렇게 그날의 흐름은 전두환 쪽으로 기울었음에도 장태완은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경 육본 수뇌부들에게 지금까지 뭐 했냐 다그치며 수경사 병력들과 출동하려 했으나 대기 중인 전차에서 장태완을 보는 즉시 제거하라는 무전이 들려왔고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서울의 봄 1212사태 군사반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참모들의 건의가 이어지자 그는 진입을 포기했습니다

 

장태완은 그렇게 전두환과 하나회세력에 맞서 보았으나 결국 12월 13일 새벽 4시경 붙잡혀 보안사로 끌려가 45일간 조사를 받은 뒤 1980년 30년의 군생활에서 불명예스럽게 예편당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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